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폴드 2세 (문단 편집) === 행정관들의 학대 행위 === || [[https://commons.m.wikimedia.org/wiki/File:Nsala_of_Wala_in_Congo_looks_at_the_severed_hand_and_foot_of_his_five-year_old_daughter,_1904.jpg#mw-jump-to-license|#]] || || '''제 몫의 고무를 채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딸의 잘린 손과 발을 바라보는 아버지.[br]딸은 5살 어린이였다. (1904년)''' || >하루당 고무 채취량을 충당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벨기에인 감독관은 그 남자(은살라)의 딸의 손과 발을 잘라버렸다. 딸아이의 이름은 보알리였고, 그녀는 5살이었다. 그리고선 그 아이를 죽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의 아내도 죽였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충분히 잔인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확실히 일을 끝마치기 위해... 아이와 엄마의 시신을 먹었다. 그리고서는 은살라에게 토큰을 던져줬는데, 그가 세상 모든 것보다 더욱 사랑했던 그의 딸이 차고 있던, 한때는 살아있었던 그녀의 몸뚱이에서 떼어낸 것이었다. 그의 삶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노예]] 생활로 인해 반쯤은 이미 파괴되었겠으나, 이 일이 그의 모든 것을 부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한 남자가 벌인 일이다. 수천 마일이 넘는 곳에 사는 한 남자, 더 이상 거머쥘 부조차도 없는 남자가, 본인의 영달을 위해 이 땅이 자기 것이라 선포하고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선포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레오폴드는 이 [[아프리카]]의 어린이들과 남자와 여자들이, 같은 인류 형제자매이며 [[유럽]] 왕족을 빚어 만든 [[야훼|하느님]]의 같은 손으로 빚어 만들어졌다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 >{{{#!folding [ 영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He hadn’t made his rubber quota for the day so the Belgian-appointed overseers had cut off his daughter’s hand and foot. Her name was Boali. She was five years old. Then they killed her. But they weren’t finished. Then they killed his wife too. And because that didn’t seem quite cruel enough, quite strong enough to make their case, they cannibalized both Boali and her mother. And they presented Nsala with the tokens, the leftovers from the once living body of his darling child whom he so loved. His life was destroyed. They had partially destroyed it anyway by forcing his servitude but this act finished it for him. All of this filth had occurred because one man, one man who lived thousands of miles across the sea, one man who couldn’t get rich enough, had decreed that this land was his and that these people should serve his own greed. Leopold had not given any thought to the idea that these African children, these men and women, were our fully human brothers, created equally by the same Hand that had created his own lineage of European Royalty.}}} >----- > Judy Pollard Smith(2014), 《Don’t Call Me Lady: The Journey of Lady Alice Seeley Harris》中 발췌 번역. 이 전기는 앨리스 실리 해리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녀는 콩고에 파견된 [[영국인]] [[선교사]]로 그녀가 찍은 사진들과 그녀가 적은 술회담은 콩고 독립국에서 벌어지는 참사를 낱낱이 고발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5gu474mcgq31.jpg|width=100%]]}}} || || '''유럽 열강들의 아프리카 식민지화를 풍자한 1900년대 초 만평.[br]독일의 경우 군국주의화, 영국은 자원과 노동력 착취 및 기독교 선교, 프랑스는 성 착취 및 '인종 혼합', [br] 그리고 벨기에는 레오폴드 2세를 연상시키는 캐리커처가 식인을 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 열강들에게서 콩고의 지배권을 인정 받은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의 개인 사유지인 [[콩고 독립국]]을 창립하고 헨리 스탠리에게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제안을 했다. 스탠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레오폴드 2세의 지원으로 [[벨기에]]의 은행과 합작하여 1878년 '콩고회사'라는 사설 회사를 만들어서 아프리카 진출에 착수했다. 스탠리의 계획은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전 콩고 지방을 돌면서 원주민 추장에게 구슬이나 옷감 등을 선물하고 자신이 가지고 간 종이 위에 그 종족의 표시를 그리거나 X표를 찍게 했다. 대부분의 족장들은 이전에 글로 된 문서를 본 일조차 거의 없었다. [[콩고]]인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호의의 표시로 찍어준 종이는 훗날 콩고를 침략하는 전면 위임장이 되었다. 콩고 사람들은 "벨기에 사람들이 우리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저러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들이 서명한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자발적으로 우리의 상속권과 계승권을 협회[* 레오폴드 2세의 관제협회인 "국제 아프리카 협회".]에 양도하고, 영토에 대한 모든 주권과 통치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중략)... 영토의 어느 지역에서든 당 협회가 시행하는 작업, 원정사업에 언제라도 '''노동력'''이나 기타 수단을 지원한다. 이 나라를 관통하는 모든 도로와 수로의 통행료 징수권, 모든 수렵, 어업, 광산, 삼림개발권은 당 협회가 절대적인 소유권을 갖는다. 이 종이에는 땅뿐만 아니라 '''노동력'''까지 제공한다는 내용까지 있었는데, 그 계약은 [[맨해튼]]을 양도한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의 조약보다 훨씬 더 악질적이었다.[* 레오폴드 2세의 경우는 계약으로 인해 원주민들의 인권이 극심하게 침해되었다. [[맨해튼]]과 관련한 [[미국 드라마]] 대사들을 보아도 지들이 잘했다고 하진 않는데 이건 그것과 비교도 안 되는 터라(...)][* 게다가 맨해튼 지역을 판 원주민 부족이 분쟁을 조장하려고 일부러 다른 부족의 땅을 자기네 땅인 것마냥 팔았단 설도 있는데, 이 같은 경우엔 오히려 피해국이 [[네덜란드]]가 된다.] 스탠리의 속임수에 의해 만들어진 문서를 넘겨받은 레오폴드 2세는 500명의 원주민 추장들에게 권리를 넘겨받은 증서를 갖고 있다며 벨기에의 75배 넓이[* [[남한]]과 [[호주]]에 대입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거의 '''[[서유럽]] __전역__'''에 필적하는 넓이의 땅이다.]에 달하는 콩고를 자신의 지배하에 놓는 데 성공했다. 그가 세운 콩고 독립국은 [[벨기에]] 정부 소유의 [[식민지]]가 아니라 그의 개인 사유지가 되었는데 이유가 참 가관이었던 것이 당시 벨기에 의회에서 식민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콩고는 그가 죽기 직전에 국가에 소유권을 반납하고 나서 벨기에령이 되었다. 벨기에 정부는 왕이 뭐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물론 국민들도 애초에 관심이 없었지만 알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오폴드 2세 혼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지낼 수 있었던 것. 레오폴드 2세는 콩고 개발에 재산을 쏟아부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투자자를 모집해서 돈을 끌어모으면 되지만 그러면 콩고에서 나는 이익을 독식할 수 없어서 모집을 안 했다.] 결국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 정부에 손을 벌리게 되는데 레오폴드 2세가 사망할 때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 양도한다는 조건으로 벨기에 정부의 돈을 받게 된다. 그는 "콩고 독립국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고 처음에는 콩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좋은 국왕처럼 보였다. 1889년에는 거의 접근이 불가능했던 산들과 [[정글]]을 통과하는 근대식 [[철도]]를 깔았고 1889년부터 1890년까지 레오폴드는 [[브뤼셀]]에서 [[노예무역]]을 없애기 위한 반노예 회의를 열었다. 그는 "[[아프리카]] 북부의 [[무슬림]]들이 노예를 사고 판다"고 비난하면서[* 사실 19세기 초반까지는 동아프리카에서 무슬림에 의한 노예무역이 [[오만 제국]]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기는 했다. 후의 일이지만 [[잔지바르]]에서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흑인의 대한 차별이 여전하던 상황에서 흑인학교에 대한 예산을 삭감하거나 흑인 경찰관을 해고하는 등의 행보가 이어지자 독립 1달만에 왕정이 뒤엎어지면서 운구지섬에서 아랍인과 인도인들이 학살당하거나 쫓거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국 시민단체인 원주민 보호협회의 명예회장에 임명되었고 수도 브뤼셀을 반 노예제도 회의장으로 제공해서 인심을 얻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다른 제국의 권력자들이 참가했고 레오폴드는 그들에게 다양한 지역 곳곳에 요새를 세울 것을 제안했는데 "그러면 '[[아랍]]' 노예상인들의 급습을 방지할 수도 있고, 요새를 대륙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운반차들의 거처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콩고에서 이런 노예상인들을 몰아내려면 군대를 쉽게 움직이게 철도 등을 깔아야 하는데, 돈이 필요하니 콩고에서 수입세를 받겠다"고 제안하자 참가국들이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1891년 레오폴드는 법을 제정하고 1892년 [[상아]]와 [[고무]] 무역을 독점해 버렸다. 곧이어 우방이-우엘레(Ubangi-Uele) 강 근처와 숲 속 주변에 살고 있던 콩고인들을 강제로 추방했는데 이는 [[고무나무]]를 수집하고 [[상아]]를 위해 [[코끼리]]를 사냥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원주민들은 고무나무 수집과 코끼리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우엘레 마을에서의 모든 무역이 금지되었다. 콩고 원주민들의 생계를 망가뜨리려는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원주민들은 이미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단 콩고 독립국의 최초의 칙령을 요약하면 콩고 내에 있는 모든 땅은 국가의 소유라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몰수 선언이나 다름없는 소리다. 그리고 [[조선로동당 39호실|이 땅에서 나오는 수익의 절반 이상이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재산이 되었다.]] 레오폴드 2세는 처음에는 장식품으로 수요가 높은 [[상아]]를 주 수입원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원주민들을 시켜 [[코끼리]]를 사냥해 상아를 수출하였으나, 예상 외로 수입이 변변찮자 레오폴드 2세는 새로운 수입원을 찾는데, 그 대상은 바로 [[고무]]였다. 때마침 세계에서는 고무 붐이 일어나고 있었고 콩고에는 '검은 황금'이라고 불리는 [[고무나무]]가 국토에 절반 정도나 있었던 것이다. 후술할 내용의 이해를 위해, 여기서 왜 고무 붐이 일어났는지를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콜롬버스]]도 서인도 제도에서 [[고무]]를 보았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고무의 활용 방법을 잘 몰랐다. 18세기 들어서야 고무가 [[연필]] 자국을 [[지우개|지우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영어]]에서 [[고무]]를 뜻하는 'rubber'라는 단어도 문질러서(rub) 연필 자국을 지울 수 있다는 고무의 특성에서 유래한 단어다. 그래서 [[영국식 영어]]에서 'rubber'는 고무라는 뜻뿐만 아니라 [[지우개]]라는 뜻도 있다.] 1823년에는 [[스코틀랜드]]의 매킨토시가 [[방수포|천에 고무를 입혀서 방수포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 후 1839년에 [[미국]]의 발명가 찰스 굿이어[* [[미국]]의 [[타이어]] 회사 [[굿이어]]는 이 사람의 이름에서 회사명을 따 왔다. 단, 굿이어 본인이 세운 회사는 아니다.]가 우연히 [[유황]]을 고무와 조금 섞으면 고무가 차가울 때 잘 굳어지지 않고, 또 뜨거울 때에도 끈적거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혁신적인 발견으로 고무장화나 비옷의 문제점이 해결되었으며 드디어 고무의 대중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1890년 [[영국]]의 존 던롭에 의해 공기를 채운 고무 타이어를 이용한 [[자전거]]가 발명되자 전 유럽에 자전거 열풍이 불어닥쳤다.[* 과거 [[영국]]에 '던롭'이라는 타이어 회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단 몇 년 만에 고무의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고무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해서 [[타이어]]뿐만 아니라 호스와 튜브는 물론 전기 와이어 등의 절연 장비의 주 재료로 쓸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폭발적으로 규모가 커지고 있던 [[자동차]] 산업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고무의 수요량이 급증했는데 기존의 고무 생산량은 수요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서 고무 원자재의 품귀 현상이 발생했고, 고무 가격은 1890년대 내내 천정부지로 급등했던 것이다. 이에 레오폴드 2세는 원주민을 몽땅 투입해서 [[고무]] 생산에 콩고의 전 역량을 집중하고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물론 [[상아]]를 비롯한 다른 특산품을 착취하는 것도 여전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원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외부에서는 콩고가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1893년 250t도 되지 않았던 콩고 독립국의 [[고무]] 수출량은 1901년 6000t으로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원주민을 시켜서 플랜테이션 산업을 시키고 결과물을 값싸게 [[착취]]하는 것은 그나마 폭정 선에서 머무르는 것이었겠지만 이 작자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고무는 응고된 수액으로 일명 '눈물 흘리는 나무'에서 채취되는데 콩고에서 눈물 흘리는 나무는 란돌피아 종으로 고무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칼로 넝쿨의 표면을 벤 다음에 양동이나 항아리를 받쳐서 천천히 떨어지는 수액을 수집해야 한다. [[고무]]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로 마을 인근의 넝쿨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동이 나 버렸기 때문에 콩고 원주민들은 [[열대우림]]의 넓은 지역으로 나가거나 나무 위에 올라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들에게 보호장비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 원주민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등이나 다리, 팔 등이 부러지는 상황이 속출했다. 게다가 연중 열대성 폭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고무나무가 자라는 지역은 습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고무 채취는 아무리 힘이 좋은 사람들도 기피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원주민들이 고무 생산을 기피하자 레오폴드는 고무를 확보하기 위해서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온갖 방법들을 동원했다. 고무 채취 작업은 '검은 용병'이라 하는 주변국 출신 원주민 군인들을 이용하여 이를 강제했는데 이들이 사용한 방법은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흑인 마을에 들어가면 곧바로 [[인질|여자들을 잡아 감금한 후]] 가족에게 이를 알렸고 가족들이 이를 풀어 달라고 하면 협상을 했다. 그 조건은 "고무를 가져와야 여자를 풀어준다"는 것이었다. 결혼한 여자의 경우 남편이 고무 채취를 거부하면 그 자리에서 강간 후 살해당했다. 남자들이 정해진 양의 고무를 가져왔다고 해서 그대로 풀어준 것도 아니었다. 여자 1명당 [[염소]] 2마리를 추가로 주어야 석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에게 개인별로 생산 할당량을 지정하고는 이를 맞추지 못한 자들은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2/MutilatedChildrenFromCongo.jpg|손을 절단하는]] 극악무도한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게다가 할당량을 못 채운 사람을 한 번은 손만 자르고 살려주었지만 두 번째는 아예 한쪽 팔을 잘라 버리고 거기에 세 번째까지 채우지 못하면 '''[[참수|목을 잘랐다]]'''.[* 이 할당량이 말 그대로 살인적이라 멀쩡한 몸으로도 채우기 힘든 수준이었는데, 손이 하나 없는 사람이 그런 할당량을 채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사실상 할당량을 못 채우면 죽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콩고의 [[벨기에]] 관리들은 열심히 일한다는 증거로 잘린 팔이 가득한 바구니를 내세우고 다녔고 벨기에 군인들은 지급 받은 총알이 낭비되거나 사냥 혹은 반란에 사용되지 않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보통은 이것을 시신의 오른손으로 증명했는데, 간혹 군인들이 총으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인간들을 빗맞히기라도 하면 아예 [[인간 말종|살아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잘라서 바쳤다고 한다]]. 1896년에 [[독일]]에서 발행된 신문에 의하면 지방 행정관이 __단 하루에__ 잘린 손 1,308개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 따위이다 보니 콩고의 원주민들 사이에선 "백인들의 통조림은 흑인의 팔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할당량은 한 사람이 죽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주변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이양되었다. 자신의 몫도 채우기 힘들 판에 남의 몫까지 뒤집어쓴 자들은 남아날 겨를이 없으니, 결국 전부 처형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삼정의 문란|처형당한 자의 할당량은 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아무튼 이러한 본인만의 만행이 [[벨기에 왕국]]에는 안 알려졌을지언정[* 콩고가 철저히 왕의 소유물이다 보니 벨기에 정부와 국민들은 왕이 벌이는 일을 알 수 없었다.] 사기에 속아 넘어간 외국에는 알려졌다. 먼저 [[대영제국]] [[런던]]에 있는 식민성에 벨기에가 얼마나 잔인하게 아프리카인들을 학대했는지 자세한 기록들과 보고서가 전해졌다. 대충 요약하면 채찍질, [[고문]], 강제 노동, 볼모로 잡아놓기, 쇠사슬에 묶어 감금하기, 강간, [[학살]] 등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하다 보니 할당량을 위해 주민들끼리 돌을 들고 서로 싸우는 일은 매우 빈번하게 벌어졌다. 나중에는 아예 [[연좌제]] 방식으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마을 전체의 주민을 싸그리 다 죽여 버리는 방법까지 사용했다. 이러한 정책에 콩고 민중들이 반항하면 군대를 투입해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최신식 현대 병기로 무장한 벨기에군에게 원시적인 무장을 갖춘 콩고 원주민들이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벨기에 정부에서 가끔 "콩고 독립국의 재정 상황을 좀 알아보자"라며 자료를 요구하면 [[분식회계|역분식회계]]로 [[주작]]질을 한 후에 수익을 축소한 자료를 제출했다. 게다가 국채도 마구 발행했는데 이 국채의 상환 기간이 99년이라 최소한 자기가 살아 있을 때에는 걱정이 없다 보니 이렇게 모은 돈으로 각종 건물이나 기념물을 지어댔다고 한다. 하는 거 보면 알겠지만 벨기에 왕국이 미래에 어떻게 되는지 관심도 없던 진짜배기 [[폭군]]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가 막대한 부를 쌓게 되자 세계의 창부들을 끌어들였다는 이야기가 전 [[유럽]]에 퍼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1885년 [[영국]]에서 열린 법정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알려졌다. 영국 여성 인력의 대륙 유출을 억제하는 단계에서 고급 '매음굴'을 고발해서 재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그 업소에서 레오폴드 2세의 이름이 나왔다. 증언에서 레오폴드는 젊은 여자들을 꾸준히 공급받는 조건으로 1달에 800파운드를 지불했으며 여자들 중 일부는 10~15세 가량의 소녀였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벌어들인 돈은 학자들이 현재 돈으로 환산한 결과 약 11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정된다. 그의 재산은 여러 곳에 숨겨져 있었는데, 레오폴드 2세의 사후 두 딸이 유산을 달라고 벨기에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콩고에서 모은 재산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자식인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벨기에 정부는 레오폴드 2세가 숨겨두었던 대부분의 재산을 찾아내서 국고에 귀속시켰다. 일부 시각을 따르면 "이런 식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수법은 벨기에가 개입하기 이전부터 아프리카의 일부 부족권에서 전통적으로 이루어진 관습이었고, 이러한 행위는 현지의 하위 관리자인 흑인들이 자체적으로 행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콩고 전역에 상주하고 있는 [[벨기에군]]은 숫자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내치를 위해서는 좋든 싫든 현지인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허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레오폴드 2세가 이러한 야만적인 풍습을 막으려고 했거나 하다못해 묵인하는 정도였다면 어느 정도 옹호받을 여지가 있으나 그는 오히려 이용하다 못해 더욱 조장하였기 때문에 크게 비판받아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애초에 이러한 처벌 방식이 관습적으로 있었다 하더라도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처럼 막 나가는 수준으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레오폴드 2세의 이러한 유혈낭자한 압제 정책은 다른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배하던 여러 [[아프리카]] 나라로 퍼져나가 이 나라들이 독립한 뒤 [[내전]]에서 반군들이 자신들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그대로 잘 써먹었다. 이러한 야만적인 방식이 공포감을 확산시키는 것도 있었고 "손이 없으면 서명도 못하고 도장도 못 찍으니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식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 [[우간다]]의 [[신의 저항군]]이 많이 써먹었다. 이들 반군 중에는 아예 레오폴드 2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들까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 초반에 주인공 중 한 명인 솔로몬 반디의 마을에 반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나온다. 주인공인 솔로몬도 팔이 잘릴 위기에 처했지만, 덩치가 좋은 관계로 팔을 잘리는 것은 면하고 대신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보내져 뼈 빠지게 노역을 하는 신세가 된다.] 채취해야 할 목록에 [[다이아몬드]]와 희토류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당시 유럽인 행정관들의 잔악행위로 인하여 많은 콩고인이 할당량 미달을 명목으로 처형당했다. 다만 당시에 정확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1924년 이전의 통계 자료가 없기 때문에 레오폴드의 콩고에서 학살 당한 콩고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추정에 따라서 적게는 수만~수십만, 많게는 백만에서 수백만 단위에 달하는 콩고 사람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 수면병과 같은 아랍 노예 상인들이 퍼뜨린 전염병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다수 포함된 수치다. 천만 이상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당대의 추정치 중 하나에 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아무리 콩고가 세계에서 11번째로 넓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수렵/채집 위주의 부족 체제였다가 15세기에나 콩고 왕국이 등장하고 제대로 된 대규모 농업의 역사는 더욱 늦어 영역 대부분이 미개간 [[정글]]이었던 콩고가 [[산업혁명]]으로 인한 식량 생산 폭증의 도움도 없이[* 남미와 동남아, 아프리카의 인구가 폭증한 것은 산업혁명의 힘으로 정글을 밀어버리고 비료를 쓰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 이전에는 인구 밀도가 매우 낮았다. [[열대우림]] 항목에 기술되어 있다시피 열대우림은 전근대 인류가 농사짓고 살기에 굉장히 척박한 [[사막]]과 다를 것이 없는 지역이다.] 이미 3000만의 인구 대국이었다는 건 쉽게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 콩고의 인구를 추산할 수 있는 명확한 사료 등이 없지만 짧은 농경의 역사, 미개간지가 대부분인 상황, 열대우림기후 등을 생각해 봤을 때 콩고의 인구수는 3000만은 커녕 1000만조차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만약 레오폴드 2세가 식민지인들에게 그냥 생산품을 수탈하고 안 하면 그냥 감옥에 가두거나 어느 정도 불이익을 주는 적당히 악랄한 선에서 끝났다면 [[세실 로즈]] 급의 골수 제국주의자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악랄한 놈이지만 적어도 대학살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단 나았을 것이다. 애초에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인 만큼 적어도 동급의 유럽 국가들에게는 욕 안 먹었을 테고. > "백인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몇 명의 원주민을 총으로 사살했다. 그러면서 원주민을 총으로 후려갈기며 '[[고무]]를 더 가져와라. 그러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고 위협했다. 공포에 질린 원주민들은 휴대할 식량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고무나무 숲으로 가려면 왕복 2주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병사들이 왔다. '뭐야,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어?' 하며 몇몇 원주민을 처자식 앞에서 사살했다. 가족들은 울부짖으면서 사체를 땅에 묻으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음식을 갖고 있지 않다.' 고 항의하자, 병사들은 '그냥 떠나라.' 고 호통을 쳤다. 불쌍한 원주민들은 모닥불을 피울 부싯돌 하나 없이 맨손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정글로 가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밤의 추위로 죽어갔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총살 당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영국]]의 [[선교사]] 스크리워너가 전한 참상.[* 출처 : 와타히키 히로시 - 질투하는 문명』.]}}} ---- > "예상가(Esanga, 콩고 강의 남쪽)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무 바구니 50개 대신 바구니 49개를 가져온 예상가 마을 사람들은 감금 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 파수병들이 그들을 찾아왔다고 했다. 예상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이 잔인하게 살해 당한 끔찍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친척들이 자신들이 보는 바로 앞에서 총살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숲 속에서 남자들이 고무를 캐내는 동안, 파수병들은 그들의 아내를 유린하고 잔인하게 다뤘으며 고문하기도 했다. 그들이 직접 겪은 고통들을 헤아려보면 그들이 백인 남성들을 바라보는 견해가 부정적이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우리 [[선교사]]들은 가끔 주님을 통한 구원이 이들에게는 조롱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또한 1905년 존 해리슨 [[목사]]는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처벌을 받았는지를 묘사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 한 [[가톨릭]] [[신부(종교)|신부]]는 흑인으로부터 들은 레옹 아킬레 피에베즈(Achille Fievez)라는 악독한 관리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는 들판에 죽어 있는 시체들로부터 손을 잘라 오게 했다. 군인들은 양동이에 담아온 손의 숫자를 일일이 확인했다. ...(중략)... 고무를 내놓지 않겠다는 마을은 완전히 싹쓸이 당했다. 나는 젊은 시절 피에베즈의 부하가 원주민 10명을 잡아다가 그물 안에 집어넣고 무거운 돌을 매달아 강물에 던지는 것을 보았다. ...(중략)... 우리는 그 자의 이름을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다. 군인들은 젊은이들을 사주하여 그들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죽이거나 강간하게 했다. ---- 1894년 피에베즈는 한 군인에게 자신이 필요한 물자들을 얻기 위해 저지른 행동을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 "나는 그들과 전쟁을 벌였다. 시범은 한 번만 보여주면 충분했다. 흑인 100명의 머리를 자르니까 그 다음부터는 나의 말대로 물자를 갖고 왔다. 나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다. 내가 100명을 죽였지만 그렇게 해서 500명을 살린 것이다." 콩고에서는 카카오에 대한 생산도 이루어졌는데 백인 관리인들은 원주민들에게 카카오를 무단재배하기 시작하고 사실상 공짜로 [[카카오]]를 무더기로 쓸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콩고는 국토 전체가 초콜릿을 재배하기 가장 적합한 땅이었다. 때문에 [[포라스테로]]나 [[크리올로]] 같은 품종 재배에 유리해 콩고 내에서 카카오 농장을 닥치는 대로 만들었고 당연히 원주민들에겐 아무런 대가도 주지 않은 채 카카오 열매를 무더기로 쓸어갔다. 현재 스위스 못지않게 유럽에서 초콜릿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고디바]]나 [[길리안]], [[노이하우스]]로 대표되는 벨기에의 초콜릿 가공 산업은 레오폴드의 카카오 수탈을 기반으로 발전했다는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